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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9-11-30 / 조회수 : 1392

당신이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통인가요? 행복인가요?

봉인사 홈페이지 이달의 법문(2009년 10월 4일 회향법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모두 함께: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 번)

Q: 여러분 이 회향 법문 듣고 난 뒤 어디로 가실 겁니까?

A: 집이요.

Q: 어떤 집이요? 행복한 집? 괴로운 집? 가고 싶은 집? 가기 싫은 집?

A: 지혜로운 집이요.

Q: 지혜로운 집?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럼 집으로 가실 거예요? 여기 잠깐 10일간 방문하신 거예요? 손님처럼 방문했다가 행복이 있는 집으로 가실 거예요?

A: 마음은 여기다 두고요. (웃음)

Q: 마음은 여기다 두고요? (웃음) 왜 마음은 여기다 두고 몸만 집으로 가십니까?

A: 좋은 법문을 들은 마음은 남아 있으라고요.

스님: 마음은 대상을 따라 일어나는 법인데, 집에 가서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땐 법문 들었던 것이 한 찰나 생각이 나시겠죠? 그래요, 우리가 여기 손님처럼 10일 잠깐 시간을 내서 왔어요. 그리고 곧 떠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떠나고 싶어 해요.

사실은 안 떠나고 싶다면 여길 떠날 수 없을 거예요. 마음은 두고 몸만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죠? (웃음) 그러나 지어놓은 빚 때문에 하기 싫고 가기 싫어도 해야 하고 가야할 때가 있죠. 빚에 의해서든 원함에 의해서든, 그러한 업의 힘 때문에 잠깐 왔다가는 이 집(인생)을 우리는 행복으로 생각하고 아주 좋아해요. 사실은 봉인사를 방문하신 이유는 영원한 집, 고통이 없는 집을 알고 싶어서 일거예요. 고통이 없는 집, 어디죠?

네. 진정한 자유, 조건 없는 행복인 열반을 맛보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거기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배우고 실천하러 여기에 왔어요. 복이 많은 사람은 봉인사에서 계속 사는 사람도 있고 빚이 많은 사람은 끌려가서 빚 갚아야 되는 사람도 있죠? (웃음) 물론 집에 가셔서도 여기서 열반을 향해 수행했던 마음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여기가 욕계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 정도 마음이 못된다면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야 돼요. 이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이기적인 사람들이 어쩝니까?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타인을 구속하고…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타인을 옭아매는 경우가 많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욕망의 집으로 잽싸게 돌아가고 싶어 해요. 여기 만약 혼자 사는 사람이 있으면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예요. 거기 가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으니…

난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한사람 손들어 보임)

혹시 꼬살라 국의 빠세다니 왕과 왕비 말리카의 얘기를 아세요?

하루는 빠세다니 왕과 그의 부인 말리까가 왕궁을 산책하고 난 뒤 왕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왕비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합니까?” 왕비가 “저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그 대답에 왕이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 나도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부처님께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그 말이 맞다고, 서로 정직할 수 있음을 칭찬했어요.

열반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다 각자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죠? 집착하죠. 그런 마음으로 또한 다른 사람을 집착하기도 하지요? 그 집착 때문에 고통이 일어나죠? 그 고통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수행자에요. 그래서 차츰 취착을 끊어가고 끊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돼요. 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해서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분이 있을 거예요. 혹시 여기 그런 분 계십니까? (한 사람 손 듦)

보살님 잘 들어 보세요. 이 얘기를 듣고 고통이 아닌 행복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래요.

부처님께서 5신통을 갖춘 보살로서 히말라야에서 은둔하고 계실 때였어요. 그 때 카시에 있는 빠딸리뿟따국을 아사카왕이 통치하고 있었어요. 그의 첫 번째 왕비는 우빠리였어요. 우빠리는 아주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생겼어요. 그래서 왕이 왕비를 엄청 사랑했겠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왕비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어요. 슬픔에 잠긴 왕이 왕비의 시신에 향과 썩지 않는 기름을 발라서 유리관 속에 넣어 침대 밑에 놓아두고 7일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으면서 정사도 돌보지 않고 시름에 빠져 있었어요. 대신들과 왕의 부모가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왕이시여! 사람은 왔다 가는 것입니다’ 라고 무상을 상기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 때 신통력이 있던 히말라야의 은둔자 우리의 보살께서 왕이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을 혜안으로 보셨어요. 그리고는 누구도 왕이 이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스스로 왕궁에 왔어요. 정원을 지키는 바라문에게 왕의 안부를 묻고 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다는 말을 듣자 왕비 우빠리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다고 말했어요. 신하로 부터 그 말을 들은 왕은 왕비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급히 수레를 타고 정원으로 왔어요.

왕이 은둔자에게 ‘당신이 왕비가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말해줄 수 있다니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어요. ‘예. 그대의 왕비는 인간일 때 보시나 계율 등의 공덕을 쌓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너무 뽐내면서 몸치장하는데 만 열중한 과보로 죽어서 이 정원의 비천한 말똥풍뎅이로 태어났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고 모르는 왕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불자님들이라면 이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경의를 표하고 공경해야 될 연장자나 덕 높은 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고 양보해야 될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고 자리를 권해야 될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는 여자나 남자는 죽어서 비천한 몸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천한 몸은 4악도의 중생입니다. 그가 혹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의 비천한 행위 때문에 비천한 일을 하게 되어요.

왕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어하자 보살은 남편 말똥풍뎅이와 즐거이 말똥을 모으고 있는 한 무더기의 똥무더기 밑으로 왕을 안내해서 그의 신통력으로 우빠리의 전신 말똥풍뎅이로 하여금 우빠리의 목소리로 말을 하게 했어요.

‘우빠리여!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시오. 전생의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제 이름은 우빠리였고 아사카왕의 왕비였습니다.’라고 사람의 목소리로 말똥풍뎅이가 대답했어요.

‘지금 너는 누구를 제일 사랑하느냐? 아사카왕이냐, 아니면 너의 현재 남편 말똥풍뎅이냐?’

‘존자시여 제가 사람이었을 때는 이 정원에서 사랑하는 왕과 함께 감각적 즐거움을 즐겼지만 지금 그런 기억은 저의 환생으로 인하여 혼동되고 있습니다. 옛날의 슬픔과 기쁨은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말똥풍뎅이의 세계에서 새로운 슬픔, 새로운 기쁨이 찾아와서 왕보다 훨씬 소중한 내 남편 말똥풍뎅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카왕은 지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아사카왕을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에서 나온 피를 제 남편 말똥풍뎅이의 발에 바르고 싶습니다.’ 라고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래서 그 아사카왕이 어쨌겠습니까? 괘씸한 것! (웃음) 그 시체를 당장 치우고 새로운 여자를 얻었어요. 그런데 왕이 조금이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새로운 여자를 얻었겠습니까? 새로운 여자를 얻어봐야 그저 그렇다는 것을 왕이 안다면 나라를 버리고 출가를 했겠죠? 그런데 새로운 여자를 얻었어요. 새로운 여자를 얻었다는 말은 욕망의 불이 다른 데로 옮겨 간 것이지요. 그지요? 결코 그 불을 끄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아무튼 욕망이란 건 끈질겨요. 그래서 지혜의 힘이 약하면 에고는 끝까지 우리가 윤회하기를 원해요. 그래서 그 욕망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죠. 뭐가 윤회하죠? 윤회하는 주체가 뭐에요?

A: 업이요.

그렇죠. 업이 윤회하죠.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우리는 업을 짓고 그 업에 의해서 다음 생을 받아요. 선업도 윤회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일 뿐이죠. 좀 달달하게, 좀 마실 만하게, 부자로, 지혜 있는 사람으로 잘 윤회하죠.

무지가 없는 아라한들은 어떤 업도 짓지 않아요. 아라한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업이 되지 않고 무기로 돌아가죠.

업! 그것이 윤회의 주체에요. 그래서 선업이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게 된다면 선처에 태어나게 되고 불선업이 발동하게 되면 사악도에 태어나게 되요.

선업의 결과는 결점이 없는 정신과 육체의 유쾌한 느낌을 수반하고 불선업의 결과는 결점이 있는 정신과 육체의 불유쾌한 느낌을 결과로서 초래해요.

여기 불자님 중에 ‘나는 고통스런 느낌보다 행복한 느낌이 더 많다’고 느끼시는 분 계세요? 손들어 보세요! (몇 사람 손든다)

Q: 어떨 때 행복하세요?

A: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면 나무와 햇빛이 찬란해서 행복해요.

Q: 그래요? 그럼 밤에도 행복하세요?

A: 밤에는 별로 안 행복해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어떤 대상들 때문에 행복해요. 그런 산과 나무, 햇살이 없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낀다면 그 대상이 없을 땐 그 행복감이 없는 불행을 느끼게 될 거예요. 우리는 위험 없는, 조건에 매이지 않는 행복을 알아야 해요.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몸에 감촉되는 것들 때문에 행복하다면 그것들이 없을 땐 불행하게 될 거예요.

어떤 조건 없이 언제나 있는 진정한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키워야 해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어요. 어떤 때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있어요. 주의력을, 이 마음을, 관심을 안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있어요. 느낄 수 있어요. 알 수 있어요. 언제든지 거기에 머물 수 있어요. 그지요?

지금 우리가 들숨날숨에 알아차림 하지요? 잘 알아차림 할 때 그 때 망상도 없고 졸음도 없을 때 행복을 뛰어넘는 평온을 우리가 경험해요. 거기서 조금 더 집중력이 생겨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관찰할 수 있게 될 때 ‘아! 모든 일어난 마음은 사라지는 구나’라고 알게 되는 위빠사나의 지혜가 일어날 거예요.

처음 이런 경험을 할 때 지혜의 힘이 약한 사람은 흔들릴지도 몰라요. ‘아! 이렇게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구나! 사라지고 싶지 않다!’라고. 어떤 사람은 선방에서 벌떡 일어나서 저 멀리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달려가서 ‘나를 좀 잡아 주세요.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해요. 누가 그러죠?

번뇌가 그래요. 이 에고가 생을 갈망하지요. 생에 대한 갈망이 눈에 보이는 것·귀에 들리는 것·코·혀·몸에 감촉되는 대상·마음에 느껴지는 대상들을 취착해요. 좋아해요. 그것들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해요. 그것들이 우리를 고문하고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놓기를 포기할 용기가 없어요. 불행히도 우리는 거의 수많은 순간을 고통을 사랑해요. 거기에 숨겨진 위험을 보지 못한 채 그것을 행복으로 착각해요. 언젠가 고통으로 변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에요.

진정한 행복은 고통으로 바뀌지 않아요. 우리 안에 가만히 사라진 적 없이 언제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우리는 사랑하기를 힘겨워 해요. 그것을 고통처럼 느껴요. 차츰 이 행복의 맛을 깊이 맛봄에 의해 우리는 더 이상 고통과 행복을 혼동하거나 속지 않게 될 거예요.

진정한 행복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 바깥의 조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오온개공을 아는 마음이에요. 그 텅 빔을 보는 마음,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물질과 정신의 소멸·정지를 보는 도의 마음, 깨달음의 마음이 우리가 호흡에 알아차림 하는 데서부터 체계적으로 노력한다면 일어날 거예요.

지금 여기 햇살 때문에 행복해하고 있다면 그 때 행복을 느끼는 그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세요. 그 마음이 출렁이면서 매 찰나 사라지고 있어요. 햇살 따라 일어난 행복한 마음이 햇살 따라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행복한 느낌도 사라짐을 볼 때 무상을 아는 지혜가 일어날 거예요. 그 때 무상을 아는 지혜 때문에 행복감이 일어난다면 그런 행복은 고통으로 변할 위험이 없어요. 이런 행복이 진정한 행복을 향한 씨앗이랍니다.

오늘 회향법문은 ‘짐경’을 말씀드리면서 마칠 거예요.

‘바라 숫따’라고, ‘바라’는 ‘짐’이고 ‘숫따’는 ‘경’이에요. 이 ‘짐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질문을 하셨어요.

첫째, 무엇이 짐인가?

둘째, 누가 짐을 지고 있는가?

셋째, 무엇이, 어떻게 짐을 취하는가?

넷째, 어떻게 짐을 내려놓는가?

Q: 자, ‘무엇이 짐인가’요?

A: 살아가는 자체가 짐이 아닐까요?

Q: 살아가는 자체, 맞습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몸과 마음이 존재하고 있어요. 순간에 존재하고 있죠? 이 몸과 마음이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어요. 현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어요.

이 몸과 마음이 짐이죠? 동의하십니까? 이 몸과 마음도 짐이고 집에 있는 아들, 딸도 짐이에요. 네? 괜히 새끼까지 쳐서 짐이 양쪽에 많아졌어요. (청중 모두 웃음) 그지요? 또 친척도 있고 그리고 내 밑에 있는 직원들, 내가 해야 할 일들, 그게 다 짐이죠? 그지요?

이런 짐들 때문에 우리가 빨리 늙지요?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어느새 확 늙어 버렸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들 그게 다 짐이죠. 그런데 진정한 짐은 사실은 이 몸과 마음이에요. 각자의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취착하면서 그것을 짐 지고 있어요.

이 몸이 빠르게 늙어가고 있죠? 태어나서 잠시 자라서 스물이 넘기 시작하면 늙고 병들기 시작해요. 무너지는 것, 변형되는 것이 물질·몸의 속성이에요. 몸이 매일 매일 두 끼도 만족하지 못하고 세 끼를 요구해요. ‘아! 배고프다. 이 음식은 싫다. 옛날에 먹었던 그 거, 어제 먹었던 그 맛!’을 요구하며 우리를 고문해요. 또 자고 나면 냄새가 나니 몰래 씻고 양치하고 영양제도 먹어야 되고 부드러운 옷도 입혀야 되고 매일 자야하고 편히 쉴 집도 필요해요. 남들이 봐도 자랑스러울 만할 집을 꿈꾸고 원해요.

몸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음식, 옷, 집, 약품 등을 우리는 요구 당해요. 우리가 ‘내가’ 아니라 ‘이 몸이’ 이러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이 몸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고통을 사랑하는 이 몸의 노예겠지요?

우리 불자님들은 각자 몸의 주인인지? 노예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어째요? 마음은 항상 대상을 갈구해요. 마음은 저 혼자 가만히 못 있어요. 무슨 일을 해서든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나타나는 것을 잡으려는, 기우는 성질이 있어요.

마음은 느낌(수온), 지각·인식(상온), 의도(행온), 의식(식온)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정신현상들을 ‘내 것’으로 취착할 때 짐이 됩니다.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3종류의 느낌을 느끼는 역할을 해요.

인식은 느낌들을 기억해요. 괴로웠던 느낌을 기억할 때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웠던 느낌을 기억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요. 상온이 느낌을 기억함에 의해 느낌을 다시 경험하게 되지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운전하는 방법, 봉인사로 오는 길 등을 기억하고 다시 오게 될 때를 위하여 ‘표시’해 둡니다. 이런 지각에 의해 두 번째는 쉽게 오지요.

이렇게 몸(색온)과 느낌이 경험한 것을 인식이 기억하고 거기로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의도입니다. 의도는 곧 업이지요. 의도에 의해서 선업과 불선업을 짓습니다.

의식은 이 모든 것들을 단지 아는 순수한 마음이에요.

예를 들어 쉽게 말해보면 느낌은 옷의 거친 느낌을 느껴요. 인식은 부드러웠던 옷의 느낌을 기억하고 그것을 원하는 의도가 일어나요. 색온과 수온, 상온은 요구해요. ‘야~ 이 옷은 까끌거리고 내게 안 어울려. 난 촉감이 부드럽고 근사한 옷을 입어야 될 사람이라고!’ 그리고 행온이 그 목적지를 향해 돌진해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드럽고 근사한 옷을 사요. 먹고 싶은 음식, 부실한 몸을 오래토록 건강히 유지하기 위하여 약품과 영양제, 보약을 사고 꿈꾸고 원했던 멋진 집을 마련하느라 바빠요.

이렇게 색온과 수온, 상온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서 행온이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선한 일을 많이 해요? 불선한 일을 많이 해요?

A: 불선한 행위요.

어떻게 그걸 아시죠? 예. 우리는 부처님 손톱위에 올려진 흙의 양만큼이나 적은 순간동안 선행을 하고 큰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순간들에서 불선행을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선한 행위를 하고난 뒤에는 기쁨과 행복이 따르지만 불선한 행위 뒤에는 후회나 부끄럼 등의 고통스런 느낌이 따라요. 우리는 이렇게 많은 순간들에서 고통을 사랑하느라 진정한 행복인 열반으로 가는 일을 미루어요.

이러한 우리가 느낌, 인식·지각, 의도, 의식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들이 시키고 요구하는 데로 이끌려가면서 고통당하는 노예라고 해야 맞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5온을 ‘나의 것’으로 취착하는데서 벌어진 이런 고통의 짐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5온을 단지 5온으로 바라보는 위빠사나 수행이지요.

둘째, ‘누가 짐을 지고 있는가?’ 누가 짐을 지고 있어요?

우리들 자신이! 누구도 우리들 자신의 짐을 대신 지어주지 못해요. 아들, 딸들이 지어줄 것 같아서? (웃음) 절대로 의지하지 마세요. 나 혼자만 이렇게 즐거운 법을 듣고 있는데 그 아들, 딸들이 나를 돌봐줄 것 같습니까? 내리 사랑인데도 이래 신경을 안 쓰는데, 지금 여기 아들, 딸들이 없네요. 그지요? (웃음) 바로 내가 이 오온을 짐 지고 있어요. 누구도 대신 이 짐을 져주지 못해요. 이 오온이 오온을 짐 지고 있어요. 이 짐은 그 시작을 모르는, 알 수 없는 윤회로부터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어요. 언제 내려놓은 적 있습니까? 이 짐을 처음으로 내려놓는 순간이 한 번 올 거예요. 와야겠죠! 그게 어떤 순간일까요?

A: 죽는 순간이요.

죽는 순간? 그 때 무명, 애, 취가 있다면 그 다음 바로 태어날 거예요. 바로 확 거머쥐어요. 와~겁난다! 죽음의 폭류를 건너가는 그 두려움 때문에 거의 맹목적으로 곧장 바로 그 다음 찰나에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거머쥘 텐데요! (웃음) 언제 완전히 한 번 내려놓겠어요? 네?

A: 열반을 체험할 때요.

그래요. 열반을 딱 맛보는 순간에 오온이 소멸·정지해요. 그 순간에 오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은 있지만 도의 마음은 오온을 더 이상 대상으로 취착하지 않아요. 오온을 더 이상 대상으로 취착하지 않고 열반을 대상으로 취해요. 그 때 오온을 우리는 완벽히 내려놓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무명, 애, 취가 있는 한은 절대로 죽을 때 아~ 내가 편안히 이 몸을 버리고 갈 것이다! 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웃음) 그렇게 무책임하게 죽으면 안 돼요. 지금까지 많이 죽어봤잖아요! 전생에 죽은 기억을 다 잊어버렸어요? 그 말똥풍뎅이 우빠리처럼 새로운 즐거움과 슬픔에 바빠요? 새로운 즐거움에 취해서 전생의 수많았던 기억을 다 잊어버렸어요?

하지만 선정력으로 잘 기억하면 전생의 죽음의 순간을 기억할 거예요. 마치 지금 죽는 것처럼 기억하게 될 거에요. 예, 그렇게 될 때 다시는 이렇게 무명, 애, 취로서 새로운 존재를 갈망하는 상태로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일어날 거예요. 그 때 죽음 없는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고 싶은 결정심, 열의가 일어날 거예요.

절대, ‘아! 이 늙고 반쯤 병든 몸 죽어버리고 그냥 몸 바꿨으면’ 하고 욕심내지 마십시오. 사람의 몸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적어요. 정신 차리고 죽지 않으면 사악도에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아요. 그러니까 지금 사람 몸 받았을 때 죽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야 돼요.

무엇을? 어떻게?

존재하는 이상 어차피 피할 수 없이 업을 지어야 하는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선업을 많이 행해야 해요.

선업의 기반에 3가지가 있지요? 보시하고 지계를 지키고 수행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보시가 많아요. 좋은 말 한 마디, 먼저 건네는 미소 등… 어떤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라고 할 수 있다면 이 보다 큰 보시가 어디 있을까요? 이런 편안함을 주는 보시가 의외로 쉽지 않아요.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계율을 지키는 것, 개미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탕 하나 종이 위에 얹어 놓으면 거기 다 모여요. 그럼 흙 위에 갖다 놓으면 돼요. 그렇게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숨에 알아차림 하는 거예요.

선정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을 닦아요. 그것을 심청정이라고 하죠. 계율을 지킴으로 말로써 짓는 업, 행동으로써 짓는 업을 청정히 해요.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번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요.

셋째, ‘무엇이, 어떻게 짐을 취하는가?’ 무엇이 짐을 다시 잡아요?

욕망이 윤회함으로써!

우리가 인간으로 남자로, 여자로 태어난 것은 여자가, 남자가 존재한다는 무명 때문이에요. 관습적으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궁극적 실재적 측면에서는 오직 물질과 정신만이 존재하지요.

이 물질과 정신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찰나에 존재했다 사라지는 무상, 고, 무아한 성품을 모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즐거운 것으로, ‘나’로, 깨끗한 것으로 잘못 아는 무명 때문에 이 오온을 좋아하죠. 이 오온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해요.

이 좋아하고 원하는 마음이 한 찰나, 두 찰나, 세 찰나 모이면 취착이 돼요. 이러한 무명, 애, 취가 원인이 돼서 인간의 몸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요. 각자 어떤 행위들을 해서 인간 몸을 받았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연기 수행을 한다면 이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인간계가 선처라고 하지요? 전생의 죽음 직전에 우리는 선한 행위를 했어요. 행위·의도는 업이지요.

이 몸을 취하기 위해서 인간이 될 만한 업을 지었어요. 매 순간 우리가 짓는 업이 일어났다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힘을 남긴 채 사라져요. 그것을 업력이라고 해요.

이러한 업과 업력에 의해서 재생연결식(태어나는 마음)과 몸과 마음, 여섯 감각기관, 접촉, 느낌들을 결과로 받게 되죠.

이렇게 업이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해요.

그것이 만들어낸 이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취착하며 좋아하지요?

얼마나 좋아하나요?

지칠 줄 모르고 좋아하지요…

봉인사에 주인 없는 고양이 가족 있지요? 그 아이들 어때 보여요? 즐거워 보입니까?

A: 즐거워 보여요.

Q: 즐거워 보이죠? 네. 집에 있는 개들도 즐거워 보입니까?

A: 네.

즐거워 보이죠? 그래요. 각자의 업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취했거든요.

존재 모두는 각자의 삶을 즐기고 좋아해요. 그렇죠? 즐겨요. 뒤에 숨어 있는 고통·위험을 모르고 즐겨요. 그 칼날 같은 찰나 위에서 달콤한 꿈을 즐겨요.

언제까지 어둠 속에서 고통을 즐길 것인가요?

고통과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우리들은 이제 그 짐들을 내려놓고 싶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넷째, ‘어떻게 짐을 내려놓는가?’ 어떻게 짐인 이 오온을 취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거예요?

A: 열반에 듦으로써.

열반에 듦으로써? 아! 네, 맞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성제를 수행함으로써!

열반은 멸성제죠. 그죠? 멸성제를 알기 위해선 도성제인 팔정도를 수행해야 돼요.

또한 팔정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대상인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해요.

고통이 뭐죠? 그래요. 이 오온, 이 몸과 마음이 바로 고통이에요.

그리고 고통의 원인은 뭐지요? 예. 집착이지요.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는 순간엔 그 원인이 반드시 있어요. 뭔가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요.

몸이든 집이든 돈이든 사람이든 어떤 마음 상태든 딴 게 아니라 오직 물질 아니면 정신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 원인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고통스런 느낌을 붙들면서 ‘아! 고통스럽다. 싫다. 떠나고 싶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킬 때도 있나요?

A: 예.

이 밑도 끝도 없는 무지와 욕망은 있는 것을 피하려하고, 없는 것을 바래요.

고통의 원인을 붙들고 있으면서 고통을 거부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웃기나요?

저도 한순간 알아차림이 없을 땐 이런 상태에 빠져 있어요. 그때 ‘지금 고통이 있군!’ 원인을 봅니다. 분명히 거기에 ‘내가’ 어찌하고 싶음과 하기 싫음이 있어요. 그 집착하는 마음을 보면 고통이 순간에 사라져 버려요. 미소를 남긴 채!

고통의 원인을 보는 도성제(8정도)의 마음이 있을 때 거기에 고통은 없어요. 한 찰나에 두 마음이 공존할 수 없지요. 고통이 없는 자리에 고요함·평화로움이 있어요.

이렇게 열반을 향한 씨앗이 자라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사성제를 매 순간 실천할 수 있어요.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이에요. 지금 바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어요. 내일을 위해서도 좋고 죽음의 순간에도 좋고 다음 생에까지 이익이 되는 일이예요. 삶에서 가장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이 집착을 뽑는 작업이 도성제에요.

도의 지혜가 한 찰나 번쩍할 때 깜깜했던 어둠이 걷히며 밝음 속에서 갈 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다시는 헤매지 않게 되지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서만 단단한 얼음덩어리처럼 굳건해진 에고를 내려놓고 부숴야 할 때 우리는 살을 베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요.

이 아픔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힘들어 하고 포기하려 하고 그냥 편안히 고통 속에서 윤회하려 하지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행복으로 가는 데도 반복적인 학습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자신을 사랑함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번뇌·고통을 포기합니다.

팔정도를 체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지계수행을 통해 몸과 말로 짓는 업을 청정히 하고 선정수행을 통해서 마음으로부터 짓는 업을 청정히 해요.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마음으로부터 짓는 불선한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해요.

이렇게 함으로써 이 오온을 취착하는 짐을 우리는 내려놓을 수 있어요.

봉인사 입구에 ‘지금 그대는 깨어있는가?’ 라는 물음이 있죠? 부처님께서 ‘아빠마데나 쌈빠데타’라고 수없이 말씀하셨는데 그건 ‘주의 깊게 알아차림하라!’입니다.

마음이 선행을 의도하는지 불선행을 의도하는지 그것을 주의 깊게 알아차림하시면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이익이 되는 선한 말과 행동과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차츰 짐을 가볍게 하는 길이에요.

모든 분들이 부처님의 쉽고 바른 가르침인 8정도를 수행해서

육체적, 정신적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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