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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행복3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0-11-07 / 조회수 : 1266

순수와 행복

 

문: 인간으로 태어난 무에도 내세에 다시 축생계에 태어나는 일이 가능 합니까? 다시 되돌아 볼 수도 있나요?

 

답: 인간으로 태어남이 너무도 유별나고 값진 이유는 일단 우리가 더 낮은 차원의 존재로 재생하고 나면 다시 그보다 높은 차원으로 거듭 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굉장히 긴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시간의 간격을 예로 들어 보이신 적이 있습니다.

드넓은 대양 바닥에 눈먼 거북이가 하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바다 표면 어딘가에 나무로 된 둥근 고리가 하나 있는데 물결에 둥실 떠서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는 100년마다 한번 씩 물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그 눈먼 거북이가 나무 고리 속에 고개를 집어넣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한데. 이는 낮은 세계에 태어난 존재가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 보다는 훨씬 높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지금 우리의 삶이 그리도 소중하며 따라서 쓸데없이 낭비되어선 안 됩니다.

 

문: 우리가 태어나기 전과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해 하는 데 고심하고 있습니다.

 

답: 이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가장 잘 관련될 수 있는 길은 그 과정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매 순간 어떤 식으로 탄생과 죽음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의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사라짐은 곧 죽음입니다. 다음 순간으로 옮겨가는 그 의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통찰의 체험과 명상수행을 통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을 체험하며, 이것은 바로 죽음과 재생의식이 이와 똑 같은 방식으로 일어남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깊은 집중 상태가 개발되면 모든 정신적 능력을 개발 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든 종교적 전통의 여러 수행자가 이러한 능력을 개발시켜 왔으며, 그러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볼 수 있는 힘만이 아니라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힘입니다. 이런 종류의 통찰력(천안통)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스승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시면서, 천상세계와 모든 정신적 능력의 가능성들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가시곤 하셨는데, 늘 끝맺는 말씀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네는 이것을 꼭 믿어야 할 필요는 없네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자네도 꼭 믿어야 하는건 아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을 개발시키는 데 있어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어떤 믿음이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지혜란 모든 믿음이나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이, 다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정확하게 꿰뚫어 봄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심(信心)

 

신념과 확신은 도의 길을 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정신의 능력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신념을 가질 때 우리의 노력을 중도에 훼방하려고 성가시게 들쑤시고 일어나는 온갖 의심들이 무기력해지고 맙니다.

신념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힘이 안 드는 것으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한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것에 헌신하거나 신뢰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쾌한 기분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그 사람 또는 대상을 믿게 됩니다. 그런 식의 헌신을 맹목적이 되기 싶습니다. 그보다 좀 더 높은 종류의 신념 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지혜와 사랑 그리고 자비와 같은 자질들을 체험하며 그 참 맛을 느낄 때 일어납니다. 이런 식의 확신은 도움이 되는데, 그런 것의 가치를 올바로 이해함은 곧 마음의 건전한 자질들을 인식하는 것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와 똑같은 자질들을 키워나가게끔 우리를 고취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 진리를 체험함으로써 비롯되는 신념과 헌신도 있습니다. 마음과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는지를 한층 깊은 단계에서 체험하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다르마 안에서 엄청난 기쁨과 확신을 느낍니다. 이것은 눈먼 감정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자질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한 것도 아닌, 바로 실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고한 마음의 확신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깨달음의 체험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에 꿰뚫고 들어감으로써, 신념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아난다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시고 나면 그 뒤엔 누가 우리의 스승이 되나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스스로가 너의 등불이 되라, 스스로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라, 결코 네 밖에서 어떤 피난처를 구하지 말라. 진리를 등불로 알고 그것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고 있으라. 진리를 피난처로 단단히 붙잡고 놓지 말라, 너 말고 다른 누구에게서 피난처를 찾지 말일이다. 아난다야. 지금이건 내가 죽고 난 후건 자기 스스로에게 등불이 될 사람, 자기 밖에서 피난차를 취하지 않는 사람, 다만 진리를 자기 등불로 삼아 단단히 거머쥐는, 진리를 자기의 피난처로 삼아 놓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서도 구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이 가장 드높은 정상에 도달할 것이니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어야 할 것이다.’

 

연기(緣起)

 

부처님께서는 바로 생로병사라는 문제 때문에 세상에 나투셨 습니다. 그 어떤 세계에도 이 생로병사가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이들의 뿌리가 되는 원인을 꿰뚫어 보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심오한 부분은 이러한 생사, 윤회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해서 계속 굴러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연결고리에 대한 통찰은 연기법 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 연기법 속에는 12개의 고리가 있습니다. 그 처음 두 개는 전생의 원인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지금의 생을 조건 지은 것입니다. 이 중 맨 처음 고리는 무지(無明)입니다.

무지란 진리를 모른다는 뜻. 다르마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또렷이 지각하지 않음으로 써, 우리가 고통의 현실과 그 원인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의 힘이 사슬의 다음 고리를 조건 지웁니다. 두 번째의 그 고리는 몸과 말, 마음의 의도적 행위(行)로서, 선하거나 선하지 않은 정신적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들입니다. 의도적 행위는 무지로 인해 조건 지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온갖 종류의 행동에 연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의 업력은 바로 사슬의 세 번째 고리를 결정합니다.

제 3의 고리는 재생(再生) 의식(意識)입니다. 이것은 이생의 삶에 있어서는 최초의 의식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전생에서 무지가 업의 활동 에너지를 조건 지웠기 때문에, 재생 의식은 수태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의지 또는 의도는 씨앗과 같습니다. 재생 의식은 그 씨앗이 싹틈과 같습니다. 원인과 결과는 인과관계를 맺습니다. 무지로 인해 온갖 종류의 행동, 온갖 종류의 업의 형성이 있었습니다. 이 업의 형성으로 인해 재생 의식이 일어나고 이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생의 삶의 첫 순간의 의식으로 인해 마음과 몸의 모든 현상들, 물질의 온갖 요소들, 마음의 온갖 요인들이 일어납니다. 또 이 마음과 몸의 현상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감각계가 개발됩니다. 이것은 태어나기도전, 태아시기에 일어나지만, 이러한 조건 지움은 평생을 통해 계속됩니다.

수태의 순간에 재생의식은 마음과 몸의 현상이 일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계 즉 다섯 가지 감각과 마음이 일어나며, 이들은 차례로 접촉을 일으키는 조건이 되는데, 접촉이란 바로 감각기관과 이에 합당한 대상 사이의 만남입니다. 눈은 생을, 귀는 소리를 ,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마음은 생각과 사상을 만납니다. 접촉으로 인해 하나의 대상은 상응되는 감각의 문을 통해 들어오며, 각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의식들과 연결됩니다. 감각에 의해 조건 지워짐으로써 접촉이 이루어집니다. 눈과 색체, 귀와 소리, 다른 감각들과 그 대상들 간의 접촉 때문에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느낌이란 매 마음의 순간, 매 접촉의 순간에 있어서 개입되는 유쾌함, 불쾌함 혹은 유쾌함. 불쾌함도 아닌 것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느낌은 다섯 감각기관을 통한 접촉이건 마음을 통한 접촉이건 간에 언제나 존재하며 따라서 이는 보편적인 정신의 요소로 일컬어집니다. 접촉에 의해 조건 지워짐으로써, 느낌이 일어나며, 그것은 곧 유쾌, 불쾌, 덤덤함 등의 성질을 갖습니다.

느낌은 이번엔 갈망(愛)을 낳게 됩니다. 갈망이란 욕심을 내며, 대상을 애타게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원할까요? 우리는 유쾌한 광경과 소리, 기분 좋은 맛과 냄새. 기분 좋은 촉감과 생각을 바라며, 불유쾌한 대상들은 물리치기를 원합니다, 욕망은 느낌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들 6가지 다른 대상들을 갈구하거나 피하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느낌이 욕망을 조건 짓습니다. 또 욕망은 집착을 조건 짓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포함하여 6가지 감각의 대상들에 대한 욕망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움켜쥐려고 탐착 하고 그것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며, 애착을 갖게 됩니다. 집착은 욕망으로 인해 조건 지워집니다.

집착 때문에 다시금 우리는 업의 형성에 관여하게 되며 여러 종류의 의지를 되풀이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전생에서 바로 이 생의재생 의식을 만들어 내었던 장본인 격입니다. 감정은 욕망을 조건 짓고, 욕망은 집착을 조건 짓고, 집착은 거듭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생성 행위(有)를 조건 지움으로서, 다음 생의 재생의식을 위한 씨앗이 되는 에너지를 자아냅니다. 집착에서 기인하는 이들 업의 행동들 때문에, 다시금 태어남(生)이 있게 됩니다. 탄생이 있음으로써 질병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쇠락이 있고, 고통이 있게 되며 인과의 사슬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어집니다.

다음 호에 계속 -통찰의 체험- 발췌 J. Gold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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