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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법문6월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0-06-07 / 조회수 : 1446

 

깨달음으로 향하는 이의 일곱 가지 디딤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공덕 쌓기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에는 몸으로 하는 것, 입으로 하는 것, 뜻으로 하는 것이 있다. 시작도 없는 전생부터 계속되어 온 여러 가지 몸들을 다 인간의 몸으로 생각하면서, 시작도 없는 전생으로부터 지어 온 죄를 참회하고, 아주 작은 티끌 속에도 부처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하면 그만큼의 공덕이 생겨난다.

한 티끌 속에 어떻게 부처님께서 계실 수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보리 낱알 하나에 백 명의 시선이 모아지면 그 낱알 하나가 백 명의 시선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일체 중생들의 마음이 모아지면 한 티끌 속에도 계실 수가 있다. 부처님들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모든 곳에 다 상주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 두 손을 합장하여 정수리까지 올렸다가 이마, 목, 가슴 순으로 내리며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 상(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머리 위 정수리의 상투 모양과 이마에 나 있는 흰털과 부터님의 목소리와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둘째는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음식이나 꽃, 과일 등으로 공양을 올릴 때는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이 먹기 전에 먼저 공양을 올려야 한다. 왜냐 하면 그러한 동기로 인하여 이생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생에는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원인을 만들어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참회하는 것이다. 전생과 이생에서도 깨닫지 못하고 조금의 지혜마저 잃게 되는 것은 탐·진·치 삼독에 의한 죄 때문인데, 이런 것들을 싫어하여 없애고자 한다면 참회를 해야 한다. 현명한 이는 어떤 죄를 지어도 그 과보가 작을 수 있으며, 어리석은 이는 조그만 죄를 지어도 큰 과보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참회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따른 차이 때문이다.

죄는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에 이른 분들에게 짓는 죄와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짓는 죄로 나눌 수 있는데, 참회를 하게 되면 자신이 지은 죄의 성질을 아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후회를 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음에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독이든 음식을 같이 먹었는데, 한 명은 바로 죽고, 또 한 명은 죽어 가고 있으며, 또 한명은 아프게 되었다고 하자. 이 아프게 된 사람은 독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을 것이며, 다시는 그런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참회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게 만든다.

참회의 이로움을 알고 나서는 다음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만약 결심으로만 그치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심을 잊을 수도 있게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여래의 이름을 부르고 진언을 외우고 경을 읽고 공성에 대하여 수행하고 공양을 올리고 불사를 행하는 등 여섯 가지를 참회의 구체적 실천으로 삼아야 한다.

네번째는 수희(隨喜: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중생들에 의한 선행을 기뻐하는 마음)를 하는 것이다. 수희란 보살행의 실천인데, 쉽지 않은 만큼 큰 공덕이 따른다. 옛날 보시를 wmf겨 하는 한 왕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을 드리게 되었다. 그 때 한 거지가 지나가다 그것을 보고,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정말 착한 일이라고 마음속으로 수희하였다.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는 거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왕이 공양을 올린 공덕보다도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큰 노력 없이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수희이다. 몸과 입을 사용하지 않고도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수희는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일으키는 마음의 기쁨이어야 하므로, 비록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공양을 올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덕행에 대하여 수희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생에 쌓은 덕행에 대하여 추축하여 수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생에 지은 덕행에 대하여 수희하는 것이다. 전생의 덕행을 추측하여 수희하는 것이란, 이생에 좋은 몸을 얻어 바른 종교를 믿고 공부하게 된 것들이, 자기가 전생에 계율을 잘 지키고, 보시를 즐겨 하고, 인욕의 수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생에 바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생에 이렇게 좋은 몸을 얻게 된 것이므로 내생에도 좋은 몸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기도를 하거나 보시를 하거나 공양을 올리거나 법문을 듣거나 계율을 지킬 때에도 항상 자만하지 않고 수희해야 하는데, 만약 자만하게 된다면 공덕이 줄어들게 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는 많은 계산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덕행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는다. 덕행이야말로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거나 깨달음에 이르게 할 디딤돌인 것이다.

남의 덕행에 대해서도 수희를 해야 한다. 원수일지라도 그의 덕행에 대해 수희하게 되면 그것에 의하여 새로운 공덕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의 덕행에 대하여 수희를 하게 되면 자신의 공덕을 늘리게 된다

다섯째는 권청(勸請:가르침 베플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신 후 칠주 동안은 가르침을 베풀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믿음과 권청에 의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브라흐마의 권청으로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苦.集,滅,道.)에 대하여 설법하셨다. 그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그러므로 브라흐마와 같이 권청을 하되, 자신의 몸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께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여섯째는 부처님들이나 여러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을 위해 열반에 들지 말고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원래 부처님들께서는 모든 곳에 상주하시고, 그 가르침 또한 없어지지 않지만, 중생들의 복덕에 따라 세상에 나타내는 몸들은 없어질 수 도 있으므로 열반에 들지 마시기를 기원해야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기원을 하는 것이다. 동기와 기원은 수행의 처음과 끝이다. 기원을 할 때에는 스스로의 공덕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공덕을 잃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그 행위는 깨달음이고 일체 중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자신의 과보보다는 일체 중생들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덕행은 말과 같고, 기원은 말고삐와 같아서, 덕행이 있으면서도 기원하지 않으면 말을 갖고 서도 고삐가 없어 말을 타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기원의 공덕은 깨달음의 밑거름이다. 한 방울의 물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바닷물이 다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물도 없어지지 않듯이, 공덕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일곱 가지를 행하게 되면 한량없는 이로움이 생기게 된다. 예배를 하면 자만심이 없어지고, 공양을 올리면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참회를 하면 탐·진·치의 삼독이 없어지며, 수희를 행하면 질투심이 없어지고, 권청을 하면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지은 죄를 없애게 되고, 불보살들께서 오래도록 살기를 원하면 부처님들이나 스승에게 지은 죄가 없어 지고, 기원을 하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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